나의 단짝은 먼 별나라 여행 중
장독대 위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다.
항아리 위에 놓았던 보리쌀도 눈에 덮이어 산새들의 발길도 뚝 끊어졌다.
감이 익어갈 즈음 용하게도 날아와 홍시만 쫓아 먹던 얌체 같은 산까치는 잠깐 안부 인사하고 날아가고 수다쟁이 참새들은 개나리 넝쿨 속에 집터 만들어 온종일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까치설날 차 창밖으로 유난히 들어오는 환한 불빛
00 요양병원 전광판이 외로움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스쳐 지나가는 불빛은 바이킹을 타듯 흔들어 대고 있다.
나의 단짝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이다.
맨발로 나와 반겨주시던 시아버지는 마을 어귀를 바라보며 목이 늘어지도록 기다리다 차 모습이 보이면 털 고무신 신을 겨를도 없이 뛰어나와 반기시며 당신 방으로 가 지인들이 찾아올 때 사 온 사탕을 가방에 챙겨 주며 좋아하셨다.
명절 전전날서부터 늘 함께하며 야야 마늘 필요하지 예 하면 어느새 마늘 다 까서 절구에 찧고 계셨고 토란은 손이 가렵다고 항상 당신 몫이었다. 유난히 좋아하시던 녹두전을 부쳐 아버님하고 입에 넣어드리면 “야 맛나다”라며 하회탈 얼굴을 하시며 소주 서너 잔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함께한 옛이야기 이제는 추억 속의 당신이 되었다.
아버님과 나를 보는 이들은 항상 묻는다 친정아버지유라고
당신에게 익숙해진 나인지 아니면 나에게 익숙해진 당신인지는 아직도 잘 모른다.
감기라도 걸리시면 아기처럼 응석을 부리시며 미음 끓여 입에 떠 넣어드리면 그제야 받아 드시던 그런 날들은 이젠 영화처럼 슬그머니 찾아와 사라진다.
참 행복한 영화 한 편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듯 입꼬리가 올라간다.
살아생전 당신 방에서 뒹굴며 천장을 바라본다. 소죽 끓이면 조금씩 퍼지는 뜨끈한 아랫목이 생각난다. 좀 전에 마셨던 안동 소주 한 잔이 뇌의 회로를 자극한다.
마음은 어느새 내 고향 언저리에서 유난히 아름다웠던 별을 바라보고 있다.
두메산골 하루에 버스가 세 번 다니는 고향에는 지금쯤이면 집마다 굴뚝에 하얀 연기가 머리를 풀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겠지. 디딜방아에 올라 아버지랑 장단 맞춰 곱게 찧은 쌀가루로 엄마는 마술을 부린다. 동그란 떡살로 찍어 낸 쫀득쫀득하고 말랑한 절편, 온종일 까만 가마솥에 구워낸 엿과 두부를 윗방에 들여놓았다. 아버지는 객지에 나가 있는 딸 늦은 밤에 오는 막차로 오려나 버스 정류장에 나와 기린 목이 되도록 기다리시던 아버지의 터덜터덜 돌아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그리움만 남기고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셨어도 늘 머릿속에 남아 마음을 찡하게 울림을 남긴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린다. 오랜만에 설에 내리는 함박눈은 마음을 평안하게 한다.
넓은 벌판을 하얗게 만들고 뾰족이 나온 벼 뿌리들은 수를 놓고 있다.
라디오에서는 쇼팽의 이별 곡이 흐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친구 녀석한테 문자를 받고 전화를 하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부고를 알려서 미안하다고
“괜찮아 그래도 엄마는 돌아가시면서 행복했겠다. 자식들 다 보고 가셨으니”
이젠 죽음도 태연히 받아들일 나이인가 아니면 익숙해져서 무디어졌나!
순리대로 사는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겠지
천상병 님 시 귀천이 떠오른다.
이 세상에서 소풍 오는 날은 예정된 날에 올 수는 있어도 소풍 끝내는 날은 누구도 모르는 것인데라고 위로의 답장을 보내고 중학교 채팅방에 부고를 올렸더니 친구들의 조의 문자가 마구마구 올라간다.
인생살이가 이런 거지 이렇게 서로 배려하고 위로하고 사는 거지 아름답게 익어간다는 것 황혼의 저녁놀을 바라보면서 농익은 복숭아처럼 그렇게 예쁘게 익어가는 어른이 된다면 더 바랄 것도 없을 듯싶다.
엄마가 요양병원 입원해 계실 때 옆에 예쁜 치매를 앓고 계신 어르신이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 “너희들이 고생한다” “ 너희들이 수고가 많다”라고 보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하셨는데 그 말 한마디가 힘이 되고 위안을 많이 받았다.
내치는 말보다 받아들이는 말을 많이 쓰고 “고맙다” “고생한다”라는 말은 달고 사는 것이 원활한 삶의 한 방편 일까도 생각한다.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2악장 연주곡이 집안에 퍼진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난롯가 옆에 앉아 사랑하는 이의 목도리를 짜는 한 여인을 연상
하며 지나온 하얀 눈 위에 그려진 내 발자국을 돌아본다.
오늘 밤도 사람이 그리운 홀로 계신 어르신들 요양원 요양병원에서는 오매불망 키워온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긴 밤을 보내시겠지 간병인님이 영상으로 보내준 엄마 얼굴을 보면서 둘은 멍하니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3년이 되어가는 데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보인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의 단단한 끈인 것을
코로나로 인해 보고 싶음도 그리움도 다 견뎌내야 하는 슬픔은 곧 괜찮아지겠지. 마스크 벗고 맘 놓고 다닐 수 있는 그런 날이 빨리 오길 간절히 바라며 두 손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