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연꽃 등
지금쯤 내 고향 뒷동산에는 뻐꾸기가 매미가 한창 노래를 부르겠지.
노란 보리가 바람에 일렁이면 선생님하고 친구들이랑 보리 베러
언덕으로 줄지어 올라가며 꿈으로 물들이던 곳,
엄마 품처럼 포근한 소백산에는 돌 틈 사이로 주근깨 많은 하늘나리 꽃이 예쁘게 피어겠다.
추운 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날 이불 보따리이고
얼음 강을 건너 산비탈 삼 십리 길 걸어 찾아갔던 절에도 된장 익어가는 소리가 보글보글 나겠지.
고향 집 앞 뜨락에는 하얀 백합이 한 마당 피어있었다.
엄마 손톱을 붉고 곱게 물들이던 봉숭아꽃 복주머니를 하나씩 터트리는
빨간 접시꽃이 울 안에서 활짝 미소 짓는다..
분홍빛 옷을 걸친 백합이 창 안으로 내어주는 향기에 맞춰 지난 추억 소환을 한다.
고즈넉한 넓은 절 마당 산새들의 노랫소리는 마음에 평화를 가져오고
바람에 이는 풍경소리가 우리를 맞이한다.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리고 하얀 연꽃 등을 올려다 봤다.
작년 서쪽 하늘로 가신 엄마를 위해 초파일에 와서 등을 달았다.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고 바람이 분다.
옥수수 잎새들이 긴 양팔을 벌리고 춤사위를 시작한다.
한바탕 비가 쏟아지더니 앞산은 운무로 가린다.
흐릿하게 보이는 산 그림은 아련한 옛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엄마가 마흔 살이 되던 해 귀한 늦둥이 남동생이 추운 겨울에 태어났다.
언제나 동생 먼저였고 난 두 번째였다. 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하고 여름이면 벌거숭이가 되어
냇가에서 온종일 놀던 그 철없던 계집아이는 겨울날 동생 똥 기저귀를 냇가에 가서 빨아다 널었다.
아버지가 무쇠솥에 밥을 지으시면 옆에 앉아서 같이 불 조절도 하고 누룽지 끓여서 드리기도 했다. 하루에 버스가 두 번 들어오는 두메산골 전깃불도 없는 하늘 아래 첫 동네 범바위골 과일이나 생선은 광주리 장사하는 아주머니가 제천 나가셔서 사와 파신다. 추운 겨울 하얀 눈이 내리는 날 아주머니는 달콤한 사과를 한 광주리이고 오셨다. 콩 두 되박을 주고 사과랑 바꿨다. 화롯불 가에 둘러앉아 사과를 먹으면 동생은 알맹이만 먹고 난 껍질을 먹어야 하는 건 줄 알았다.
동네 어귀에 우물이 있어 겨울이면 적은 양의 물이 돌 틈 사이로 나와 두레박으로 겨우 퍼낸다. 열 셋집이 그 우물물을 먹으니 그야말로 눈치작전이다.
슬며시 방에서 나와 물지게를 지고 우물로 간다. 양 초롱에 반쯤 채워 앞으로 서너 번 뒤로 서너 번 휘청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는다.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건지 알았다. 엄마를 기쁘게 하는 것이 최고인지 알았다
분당이 신도시로 되면서 딸 근처로 이사를 오셨다. 내내 공사장에서 일하시고 아끼고 아껴 아들 아파트 한 채 장만해 주었다. 좌석버스는 버스요금이 비싸다고 한 시간씩 기다려서 일반 버스 타고 쉬는 시간에 자투리 철사를 주어다 껍질 벗겨 고물상에 내다 팔고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사장에 나가 일한 보람이셨다. 억척같이 산 엄마의 삶이었다. 아버지는 치매 증상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손 놓으시고 동네를 다니시면서 남의 고구마도 감자도 싹을 뽑아 동네 어르신들이 속상해 오시는 날엔 여지없이 엄마의 하소연이 시작된다. 다 들어 드리면 엄마는 화가 다 풀리셨는지 전화기를 내려놓으셨다.
여든일곱 그리고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말이 제대로 되질 않는다고 하던 일 멈추고 내려가니 입이 조금 삐뚤어졌다. 병원에 모시고 가니 뇌경색 초기 증상이라고 일주일 입원을 권유해 입원하시고 낮엔 언니가 밤엔 내가 병간호를 하는데 하루 저녁엔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이상한 행동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낯선 일이 벌어졌다.
링거 줄을 뽑고 옷을 갈아입고 갑자기 집에 간다고 떼를 쓴다. 5인 입원실에서 소리를 버럭
버럭 지르시고 막무가내였다. 도대체 뭘 잘못해서 저러실까 해도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아 밤새 씨름을 하고 동생 출근 시간에 맞춰 병원으로 불렀다. 동생을 보더니 고분고분 말을 듣는다. 언니나 동생한테는 늘 관대하지만 내겐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으실까. 뭐가 잘못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 서운하셨을까. 나중에라도 편찮으시면 보살펴 드리려고 시간 쪼개어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땄는데 내 나이 오십이 되도록 부모님께 말대꾸 한번 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폭풍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삼각김밥 하나 먹고 회사 출근하는 택시 안에서 아저씨께 미안하기도 했지만 쏟아지는 눈물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눈물은 볼을 타고 줄줄 흘렸다. 원망도 아니고 미움도 아닌 그 뭔가가 나를 괴롭혔다.
마음 상한 일만 있으면 늘 그 화풀이 상대는 작은 딸인 나였다. 엄마가 화가 나면 그냥 그렇게 하시는 건 줄 알고 말없이 가만히 있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살아온 것이 참 좋은 방패이기도 했다. 남한테 내가 맞춰준다는 것이 큰 장점이 되기도 했다. 엄마 생신날에 어버이날에도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을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말다툼 없이 늘 평안한 하루가 되고 이 세상에서 젤로 행복한 사람 하면 나라고 서슴없이 말하곤 했다.
늘 지상의 낙원에서 산다고 생각한 나에게도 지상의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한 달의 어둠이 나를 가두고 있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움츠리고 앉아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어둠의 터널 속에 갇혀버린 힘든 시간들은 산사람의 몫은 아닌 것 같았다.
말도 웃음도 다 잊어버린 멍청이가 된 그런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마음은 엄마를 내가 챙겨야지 하면서도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구절초 꽃을 좋아하는 내게 남편은 보여준다고 데려가도 마음속에 동화는 전혀 일어나질 않았다. 그냥 나는 아파 너무 아파 그런데도 엄마 생각뿐 마음 따로 몸 따로 인 생활이었다.
그렇게 한 달 뒤 다시 두 번째 뇌경색이 왔다. 골든타임을 놓쳐 쓰러진 날 손을 꼭 잡고 미
움도 원망도 다 꺼내기 시작했다. 엄마도 나도 마음 밑바닥까지 둥지를 틀고 있던 그 뭔가를 다 끌어내고 말없이 털어냈다. 원망도 미움도 아닌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까만 하늘이 열리고 와르르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후련해지기 시작한다.
마음만 먹으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걸 바보같이 먼 길을 돌아왔다.
다시 내겐 평화가 찾아오고 예전의 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쉬운 것을 그 짧은 길을 너무 멀게 돌아오면서 진작에 그 모든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조금만 더 생각을 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인데 라고 내게 다시 질문과 답을 한꺼번에 던졌다.
편마비가 왔는데도 엄마는 내게 발길질을 했다. 다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장난으로 발을 꼬집고 툭툭 치기도 하고 요양병원에서 지내시며 다시 둘의 관계는 부드러워졌다.
내가 먼저 이해해야지 엄마는 변하지 않으니 다시 어둠 속에서 나를 꺼내기로 했다.
주말엔 시간 비워놓고 엄마랑 함께하며 목욕도 시켜드리고 풀꽃반지도 만들어 열 손가락 끼어 들이고 들꽃 송이 한 다발 만들어 주시면 간호사들한테 자랑도 하시고 함께 부르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둘이 합창을 하고,
반야심경도 외고 점점 흐릿해져 가는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들을 다 꺼내기 시작했다.
무엇을 물어봐도 대답은 몰라이다. 옛 기억들 찾아내라고 떼를 써도 몰라 바보라고 놀리면 웃기만 하고 지난 이야기 들춰내면 놀라는 모습을 하시고 엄마를 위해 옛 사진도 넣고 시도 넣어 책도 한 권 만들어 드렸다. 기억을 더듬고 한쪽 팔로 탁구도 치고 겉으론 아무런 표현은 하지는 안 했어도 마음은 짠하고 아팠다. 질문에 답은 몰라였어도 삼 남매 이름은 꼭 붙들고 계셨던 엄마
서쪽 하늘로 날아가시던 날, 숨이 가쁘셔도 자식들 하나씩 팔 들어 안아주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품어주고 싶어 하신 무한한 자식 사랑, 어깨를 다독여 주시던 그 따뜻한 엄마의 손 눈 맞춤 숨비소리 심장이 멎을 듯한 터질듯한 아픔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를 썼다.
엄마랑 함께한 그 날들에 감사함을 그리고 잘 가시라고
사십구재 되던 날 묘소에 가서 술 한잔 따라 드리고 좋아하시던 포도 한 송이 드리며 말했다. 엄마 염라대왕이 둘째 딸한테 왜 그리 모질게 했냐고 묻거든 당당하게 말해
너무 사랑해서 그랬노라고 아직도 엄마 마음을 다는 헤아리지 못하지만 이젠 그것이 다 사랑이라고 묻어버리기로 했다
어쩌면 세상에서 하나뿐인 내 편이셨던 영원한 나의 지주라 생각했던 엄마가 모질게 한 그 하룻밤의 이야기가 나를 어둠 속에 가두어 힘들게 했어도 지나고 나니 원망도 미움도 아닌 자신에 대한 서러움에 눈물인 것을 알게 되었다.
입맛 없는 날엔 엄마 우리 콩 칼국수 해 먹자 하곤 내려가 홍두깨로 국수를 신바람 나게 밀어내는 엄마 사진 찍어 가족 카톡에 올려놓기도 하고 삼겹살 구워 소주잔 기울이면 엄마 한잔 나 한잔하던 김장김치 잎 길게 부쳐 먹던 김치전도 추석이 다가오면 미리 송편 만들며 엄마가 예쁘게 못 만드니 이리 못난이 딸을 낳았나 보네 하고 장난 말을 치던 울 엄마는 이젠 다 추억 속으로 들어가셨다.
동구 밖 어귀서부터 엄마 생각하며 싸리문 들어오기 전에 엄마하고 큰 소리로 부르면 어떤 날에는 부엌에서 또 어떤 날엔 방에서 나오셔서 꽁꽁 언 고사리손을 녹여주시던 언제나 늘 기다려 주셨다. 부엉이 울던 무서운 밤 열이 나고 온몸을 떨던 내게 엄마는 꿀 한 사발 따뜻하게 해서 마시라고 주시곤 옆에 누워 당신의 거친 손바닥으로 배를 문지르며 주문을 외신다. 용희 배는 똥배 엄마 손은 약손 계집아이는 언제 아팠냐는 듯 사르르 잠이 들었다.
소나무 껍질처럼 거칠었던 엄마 손이 그리운 오늘도 말없이 하얀 연꽃 등을 올려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