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언니가 천 원짜리 일곱 장을 가지고 와선
"이것이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돈이다. 은행 가서 바꿔야겠어."
하길래 " 나 세 장만 줘" 하곤 유품으로 간직하려고 들여다보니,
지폐는 닳고 닳아 헤지고 찢어지고 귀퉁이는 떨어져 나가고
아버지의 손 때가 묻어나고 묻어나 꼭 아버지 손을 잡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치매가 오기 시작했다. 그리 심하진 않고
이때 금 한 번씩 고향에 가신다고 집을 나가 길을 잃고 헤매셔 아버지 찾아
삼만리를 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원망하진 않았다.
하루, 이틀, 반나절 그날도 아버지를 찾아 동생이랑 광주 시내를 돌면서
두리번거리는데 경찰차 안에 아버지가 계셔 차를 세우고 아버지랑 만났다.
그날 난 처음으로 폭풍 같은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강을 이루어 바다로 흘러가겠지.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 모습이라기 보단 몰골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야말로...... 난 나에 아버지를 찾은 그 안도감으로
집에 모시고와 목욕을 시켜드리고 따뜻한 밥을 지어 드렸다.
그것이 어쩌면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 씨께 지어드린 밥상이었다.
시아버지를 모시면서 삼시 새끼 작은 밥솥에 따뜻한 밥을 지어 올리면서, 나도 모르게
주르르 흐르는 그 눈물은 정말 감당할 수가 없었다.
법 없이도 사실 어르신이라는 그 말을 동네에서 달고 사셨던 울 아버지
양반이라는 그 수식어는 항상 아버지를 대표하는 말이었다.
넘한테 싫은 소리라곤 하지 못하는 울 아버지는 자식들은 정이 넘칠 만큼
관대하셨다. 냇물이 불어 징검다리를 건너지 못하는 날이면 당신의 등을 내놓으셨던,
운동화가 눈에 젓어 다음날 신지 못할 것 같으면 방에 들여놨다 다음날 소죽 끓이는 불어
따뜻이 불 쐬어 내놓으셨던, 어버이날 카네이션 한 송을 하루 종일 달고 다니시다
방안 액자 아래 당신의 꽃밭을 만들어 놓으셨던 울 아버지.
가을이면 산머루 덩굴 걷어와 우리 삼 남매 입술을 보랏빛으로 물들게 하셨던 울 아버지.